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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학회 소식

[인터뷰] 한국역학회 기획 인터뷰 (3) 맹광호 교수와의 대화​

  • 작성자한국역학회
  • 작성일2019-05-29
  • 조회수5398

[인터뷰] 한국역학회 기획 인터뷰 (3) 맹광호 교수와의 대화​

한국역학회 제7대 회장을 역임하신 맹광호 교수님과의 인터뷰가 2018223일 오후 1시부터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218호 예방의학과 세미나실에서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날 교수님과의 일문일답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자: 임현우 교수(카톨릭 의과대학)

글.사진: 최영주(한국역학회)




현상은 우연이지만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는 필연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 교수님 첫 질문으로, 의학 특히 예방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에 대해 먼저 듣고 싶습니다.

현상은 우연이지만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는 필연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이 있어요. 지난 과거를 돌아 보면 모든 게 다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 같아도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니 내가 의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특히 예방의학을 전공 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이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의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관심이 없었다기 보다 의학은 돈 있는 사람들이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고등학교 3년 동안을 장학금과 남의 집 입주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 형편에 돈이 많이 드는 의과 대학엘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마침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수학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수학을 굉장히 잘했어요. 저더러 유명한 수학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래서 서울대 수학과엘 지망해서 합격했어요. 그러나 서울대로 가지 않고 연말에 시험 삼아 치러 합격한 육군사관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다시 대학 4년 동안 남의 집 가정교사를 하느니 학비가 안 드는 육사를 택한 거지요. 그러나 저는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중도에 퇴교를 했고 다음해 가톨릭의과대학엘 진학 했어요. 이과를 전공한 제가 장차 사병이 아닌 장교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대학학과는 의과대학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마침 제가 육사에 있으면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조건 가톨릭의과대학을 택했어요. 지금도 저는 이 결정을 제가 살면서 가장 잘 한 결정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답니다. 매일매일 공부와 신앙생활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대학 다닐 때도 저학년 때는 예방의학을 전공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던 본과 2학년 어느 예방의학 강의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소인은 치병 하고 중인은 치인 하며 대인은 치국한다.(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 라는 손 문(孫 文) 선생의 얘기를 해 주셨는데 그 얘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어요. ‘큰 의사는 질병이나 환자 하나 하나를 치료하기보다 국민 전체의 건강을 의해 교육하고 연구하는 것이라는 이 말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던 거죠. 다만 곧장 예방의학을 하기보다 미국 가서 임상을 하고 거기서 보건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었지요. 다행히 제가 짧게나마 육사생도 생활을 한 것으로 보충역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재학 중 ECFMG 시험을 거쳐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기로 했지요. 뉴욕에 있는 병원에 취직이 되어 졸업하던 1968315일 출국 비행기 표까지 다 받아놓은 상태에서 당시 교무처장인 조규상 교수님께 인사 갔다가 일단 한국에서 예방의학을 시작하라고 적극 권하시는 바람에 예방의학교실 조교 생활을 시작했어요. 모두에도 얘기했듯이 모든 게 우연의 연속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다 필연적인 것들이었다는 확신이 들어요.


 - 당시 가톨릭의과대학은 산업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교실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교수님께서 산업의학을 전공하지 않고 일반 역학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와 그 당시 상황은 어떠셨나요?  

임 교수도 알다시피 당시 우리 가톨릭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은 산업의학이 핵심 교육과 연구, 그리고 사업의 중심이었어요. 60년대 초에 이미 전임강사 이상의 교원만 10명이 넘는 국내 최대규모의 예방의학교실이었지요.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를 시작하던 때이고 그만큼 이분야 일이 많았을 때였는데 당시 주임교수이신 조규상 교수님께서 일찍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근로자들을 위한 산업의학을 시작하셨지요. 저도 당연히 산업의학으로 조교생활을 시작했고 석사학위도 그 분야로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차 예방의학교실로 발전하려면 일반 예방의학, 특히 역학과 보건관리 분야 교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일을 제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사명감이 생겼어요. 그래서 조교 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학과 도서실에 있는 책들을 읽고 요약을 하기 시작했고 가끔 서울대나 연세대 예방의학교실 세미나에도 참석을 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마침 1973년 가을 3개월 간 콜롬보 플랜 장학금을 받아 호주에서 열린 보건 및 병원행정 연수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가톨릭의대에서 제가 처음으로 예방의학 전반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시작한 셈이지요. 박사학위도 비율사망지수로 본 한국인의 건강수준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받았어요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존스홉킨스하고 하와이 대학교 에서 역학 공부를 하셨는데, 그때 꽤 유명한 역학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셨는데요. 그때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

  1970년대 초에 미국 NIH에서 한국 의대 교수들에게 1년간 장학금을 주는 게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매년 한 명씩 뽑아서 장학금을 주었는데 제가 그것을 알고 신청해서 선정이 되었지요. 그 장학금을 받아 19757월에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엘 박사 후 연구원 자격으로 갔지요. 그때는 인구와 보건에 관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인구보건학과에 소속이 되었는데 지도 교수와 상의해서 역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어요. 마침 그 때 홉킨스에는 Abraham Lilienfeld, Leon Gordis, Anita Bahn 같은 유명한 역학자들이 있어서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Lilienfeld 교수는 1979년에 미국역학회를 만든 분이고 82년에 초대 회장을 맡은 분이에요. 강의를 듣다 보니 내가 미국에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 Mausner Bahn 의 책 <Epidemiology: An Introductory Text>를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 원래 나는 박사 후 연구원으로 홉킨스엘 갔었던 것인데 6개월이 지난 다음 박사과정으로 전환하고 싶다는 의견을 대학에 냈더니 그럼 미국 MPH 과정 이수 자에 해당하는 자격시험을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1주일 간격으로 1개월 간 역학, 통계, 환경위생, 그리고 보건관리 등 4과목 시험을 보았고 운 좋게 모두 합격을 했어요. 그 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몰라요. 이후 박사과정 공부를 6개월간 하고 일단 귀국을 했어요. NIH 장학금 계약기간이 끝났기 때문이지요. 홉킨스에서 학비 면제 장학금 약속을 받고 19768월에 일단 귀국한 다음 다시 도미 준비를 하던 차에 미국 하와이에 있는 <동서문화센터, The East-West Center>에서 미국 유학 장학생을 뽑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력이 좋아지면서 없어진 장학금이지만 1970-80년대에 가장 혜택이 많은 장학금이었지요. 매년 주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어문학 계열 학생 4-5명을 뽑는 이 장학금은 경쟁률도 높았고 의학계열은 아예 수혜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인구사회학분야로 지원을 했지요. 이미 나이도 40에 가깝고 국내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왜 다시 미국 학위공부를 하려고 하느냐는 시험관들의 날카로운 영어 질문에 새로운 영역의 공부를 하고 싶다는 대답을 용기 있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한국에서 이 장학금을 받아 미국 박사학위를 한 사람들이 약 200여명 되는데 의학계열 학생은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요. 이 프로그램에 다녀 온 사람들이 우리나라 정치, 경제, 학계 등에서 이름을 날려 한 때 동서문화센터 출신들을 하와이 마피아라고도 불렀지요. 하하하

 19798월 하와이로 간 저는 동서문화센터 인구문제 연구소 연구원 겸 하와이대학교 보건대학원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역학공부를 했어요. 저보다 먼저 홉킨스에서 공부하신 김정순 교수님이나 김일순 선생님과는 다소 다르게 만성질환 역학을 전공했지요. 역학이론, 역학연구역사, 역학논쟁, 그리고 사회학과에서 개설하고 있는 사회조사방법론 공부가 재미 있었고 특히 만성질환 역학연구 방법론을 전공했기 때문에 통계학이 많았어요. 여러 형태의 다 변량 분석이 힘이 들었지만 컴퓨터와 연계한 자료분석 방법이 무척 재미 있었어요. 당시는 PC가 막 개발되던 시기여서 직접 사용은 못했고 자료들을 펀치카드로 만들어서 밤새 컴퓨터센터에서 밤을 새우며 지냈던 일들이 기억에 생생하네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강의와 실습, 그리고 토론 등으로 진행된 학과 일정이 여간 빡빡하지 않았어요. 자랑 같지만,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래서 거의 매 학기 평균 A 학점(straight A) 통보가 대학에서 장학금 지원기관인 East-West Center 를 통해 나에게 편지로 전달 되어 올 때마다 기분이 최고였어요.

내 박사학위 논문은 <Factors affecting the Korean Secondary Sex Ratio: Demographical and Epidemiological Considerations>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는데, 12,000명의 한국인 신생아의 성비에 영향을 미치는 연구로 세 가지 다 변량 분석을 사용해서 비교 분석한 연구였지요. 지금처럼 PC로 문헌 검색을 할 수 없던 시대여서 일일이 도서관에 가서 관련문헌들을 복사했는데 그 양이 방대했어요. 복사도 1장에 미화 5센트 할 때니까 비용도 많이 들었는데 그 모든 비용을 동서문화센터에서 충당해 주었지요. 내 연구실이 건물 5층이었는데 논문 마지막 페이지를 타이핑하고 나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일이 생각나네요. 너무 기쁘고 감사했지요.


- 그 동안 교수님께서는 주로 어떤 내용의 역학 연구를 많이 하셨는지요?

 내가 그 동안 논문은 많이 썼지만 실제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대신 역학연구방법론을 공부한 덕택에 기존자료들을 활용한 연구논문들을 많이 썼지요. 특히 문헌 연구에 해당하는 종설 논문이 많아요. 다행히 저는 평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관련 책들을 많이 읽은 덕분에 역학을 포함한 의학분야에서 칼럼이나 종설을 많이 쓸 수 있었지요.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대학 졸업 후 역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 약 10년 간은 지역사회 의학이나 산업의학 관련 조사연구들을 했어요. 1970년대 초에 각 의과대학마다 유행했던 농촌 지역보건실습을 통해서 농부 증이나 일반 질병 유병률 조사 같은 것을 했고 산업장 근로자들의 직업병 실태와 관련 경제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연구도 열심히 했습니다. 한 번은 청계상가 의류제조업자들의 폐결핵 유병 조사와 함께 사회경제적 상태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일이 우리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북한에 알리는 일이라고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주의를 받는 위협(?)까지 당한 일이 있어요.

 1983년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학회 일에도 열심히 관여했고, 특히 1985년부터 8년동안 연 2회 발간되던 우리 학회지에 <역학 논쟁>이라는 종설을 16회에 걸쳐 연재했지요. 서로 찬반이 갈리는 역학연구 결과들에 대한 쟁점 분석 연구들이지요. 산문 형식의 이 종설 논문을 쓰면서 공부도 많이 했어요. 우리가 역학 논문들을 보면 가끔 결과가 동일하지 않은 연구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역시 연구대상 선정에서부터 연구방법, 그리고 통계분석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많거든요. 그런 것을 찾아 토론하는 형식의 이 <역학논쟁>은 지금도 내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논문들이에요. 2009년 제가 역학회로부터 1990년대 논문다작상을 받은 것도 이들 논문의 공이 컷 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저의 역학연구 중에는 1988년에 당시 한국금연운동협의회 회장이신 김일순 교수님의 권유로 국내 최초 흡연관련 사망 추계 연구를 한 것이 있어요. 그 때 우리나라에는 질병별 흡연의 기여위험도나 상대위험도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가까운 일본의 자료를 참고로 한 추계 논문이지요. 이후 이를 계기로 병원 자료를 이용한 흡연의 위험도 조사연구를 여러 편 한 일도 기억에 남네요. 물론 사례-비교군 연구가 대부분이지요. 때로는 비교군을 흡연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환자나 지역사회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연구들을 하면서 정말 재미 있었어요.

 저의 역학연구 역사와 관련해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학에서 발견된 사실들, 그러니까 질병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들을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소위 과학의 생활화운동에 앞장섰던 일이지요. 김일순 교수님과 함께 시작한 금연운동이 그렇고, 과학분야 여러 대학 교수들과 함께 1976년에 만든 <한국과학저술인 협회> 라는 단체가 그래요. 내가 여러 언론 매체에 과학 칼럼을 많이 썼는데 지금도 이 일은 역학자가 아니었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국가차원의 역학관련 정책연구에도 참여하고 자문했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제가 역학자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의 일 3가지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복지부 공무원과 교수 몇 명이 함께 영국 NHS감염성 질환 감시체계’ (Communicable Disease Surveillance System) 현장 조사를 다녀온 일이고, 또 한 번은 미국 NIH에서 열린 전염성 질환의 재 발생 및 신종전염병 발생에 대한 대책’ (Responses to the Emerging and Re-Emerging Infectious Disease) 한미간 관계자 회의에 역시 복지부 관계자들 함께 참석해서 논의했던 일이에요. 국내에서도 보훈처의 요청으로 우리 역학회가 관여해서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고엽제 피해 구제를 위한 치료 및 보상기준 마련 개발 연구를 한 일이 있어요.



 ​"한.일역학회 초석을 다지다."

- 교수님께서 역학회 회장을 하시면서 남기신 업적 중에는 특히 한.일역학회 학술교류 협약을 맺으신 것을 들 수 있는데 그때 계기나 상황은 어땠는지요? 그리고 또 그 때 하신 일 중에 중점을 두신 일은 무엇이었나요?


우선 한국역학회와의 관계인데, 저는 한국역학회가 만들어지던 1979년에 하와이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초기에는 학회에 기여한 바가 없어요. 그러다가 1983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 나와서부터 학회 일을 관여했고 내가 학회장을 맡은 것은 1995년이에요. 그 때는 학회가 만들어진 지도 10여년이 지나 꽤 기반도 단단해 졌죠. 여러 후배들도 나오기 시작해서 학회도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일 때였죠. 마침 1996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국제역학회 (International Epidemiology Association, IEA) 세계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국내에서 10명정도가 참석을 했어요. 일본역학회는 우리보다 늦은 1991년에 만들어 졌는데 의과대학도 우리보다 훨씬 많았고 무엇보다 나라가 우리보다 커서 그랬겠지만 그 때 벌써 국제회의를 유치하고 있었어요. 그 모임에 갔을 때, 서울대 안윤옥교수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아오키 선생이 일본역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분에게 제가 한.일역학학술교류를 제안했지요. 그게 시작이에요. 한동안 매년 서로 돌아가며 해당국가 학술대회 기간 중 한.일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그 뒤 한 동안 중단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다 2015년에 다시 재 협약을 맺었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리고 내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 <역학용어집>을 만든 것도 성과라면 성과이고, 학회장 임기를 6개월 단축해서 지금처럼 6월에 총회를 하도록 정관을 개정하면서 회장직도 6개월을 반납했지요. 학회 회무 및 재무 관리상 연말에 총회를 하는 것은 매우 불편했거든요.

무엇보다 나는 운이 참 좋았어요. 당시 서울대 안윤옥 교수, 유근영 교수, 연세대 서 일 교수, 그리고 가톨릭대 이원철 교수 등 쟁쟁한 역학자들이 포진해서 저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이 자리를 빌어 이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싶어요.



“보건의료인에게 있어서 윤리는 멍에가 아니라 희망이다."


- 교수님께서는 역학자로서 평소 의학교육이나 의료윤리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해 오신 걸로 알고 있고, 역학을 포함한 공중보건의 윤리에 대해서도 글이나 말씀을 많이 남기신 것으로 아는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으셨나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예방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임상의사가 나무 하나하나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예방의학도는 숲을 보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도 학생교육 전반에 관한 관심과 전문성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환자나 지역사회 주민들을 대하는 의사에게 높은 윤리성이 요구 된다는 것을 느끼고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마침 1978년 여름에 한 달간 호주 시드니에 있는 WHO 의학교육센터에 연수교육을 다녀오면서 처음으로 학습목표의 개념을 배워 왔고, 같은 시기에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와 한국생명윤리학회 창립에 관여하게 되었지요. 특히 생명의료윤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 천주교회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방한한 것을 기념해서 한국가톨릭의사협회가 국내 최초로 <의학윤리>라는 책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내가 조규상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실무를 담당하면서 사실상 편저자가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1988년 한국금연운동협의회 창립에 관여한 것도 제가 예방의학도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지요. 이런 연유로 그 동안 대한예방의학회나 한국역학회 외에도 한국의료윤리학회, 한국의학교육학회, 그리고 대한금연학회 회장도 역임을 했지요. 한국의료윤리학회와 대한금연학회는 지금도 명예회장으로 관여하고 있어요. 내가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서 국민훈장 동백훈장, 그리고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한 것도 모두 예방의학, 특히 역학을 전공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대한의사협회 중앙윤리심의위원이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 그리고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으로 활동 한 것도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요. 어려운 진료여건에서 고생하는 의료인들을 대상으로 윤리문제를 강조하면서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의사들에게윤리는 결코 멍에가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이 내 신념이에요. 윤리적인 진료 환경이 만들어지면 의료인은 저절로 환자나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기 때문이에요.

 대학을 정년퇴직 한 이후인 2010년부터 12년까지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에 임명을 받고 일을 한 것도 2000년 초부터 이 위원회 청소년 유해약물 예방활동 자문활동을 10년 간 해온 예방의학도로서의 경력 때문으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 역학자가 바라보는 지금의 한국 사회 혹은 의료계의 상황에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한 말씀해 주시죠.

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은 의학 뿐 아니라 우리사회 모든 분야에서 다 얘기를 해요. 화재예방, 재난예방, 자동차 사고예방, 산업재해예방의 중요성이 그 좋은 예지요. 그러나 모두 말로만 예방을 외치지 실제로는 이들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이나 사회적 시스템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에요. 물론 예방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국 예방 활동을 강화하지 않으면 우리 국민 모두가 계속해서 많은 피해를 입게 마련이지요. 질병 예방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런데 지금 대학에나 국가에서도 예방의학의 중요성이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있어요. 현 정부의 소위 문 케어에 대해서도 한 편으로 이해는 하면서도 우려 또한 금할 수가 없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차원의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의료 혜택을 주려고 애쓰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지요. 병이 나서 지원을 해주는 물질적인 지원에 대한 의료 수요는 인구의 고령화 만으로도 앞으로 끝없이 늘어 날 것이 분명하지 않아요?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을 위한 대대적인 예방의학적 전략이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예방적인 전략, 즉 보건 관리를 위한 제도나 인프라는 그런대로 잘 되어있다고 생각해요. 국민건강증진 법이나 건강증진기금, 그리고 전국 시, , 구에 설치되어 있는 보건소가 있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이런 법적, 재정적, 시설과 인력을 체계적으로 관리운영 하는 체제가 미흡해요. 일본의 경우, 고령화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맞으면서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를 줄이고, 오래 살되 건강하게 사는 나라를 만드는데 노력해 왔는데 우리나라는 오래 사는 건 바짝 일본을 따라 가면서도 건강수명은 일본에 거의 10년 뒤져 있단 말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과학의 생활화, 건강 지식의 생활화를 위한 일을 우리 예방의학 하는 사람들이 앞서서 해야 해요. 이 일을 위해서 정부는 물론 예방의학도들 특히 역학하는 우리들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솔선수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꼭 말하고 싶어요.


"역학자는 누구보다 윤리적이면서 건강문제에 있어서 솔선수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예방의학, 특히 역학을 전공하는 후학들이 역학자로써 갖추어야 될 자세나 덕목에 대한 조언을 좀 해 주세요.

앞에서도 잠시 얘기 했지만, 예방의학, 특히 역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학문적인 연구나 역학 교육 활동도 중요하지만 역시 연구결과를 어떻게 실 생활에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 돼요. 질병예방이나 건강증진 관련 보건단체와 일반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해서 기여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적극 권장하고 싶어요. 웬일인지 지금도 이런 단체에 의외로 예방의학 전문가들의 참여가 적어요.

     그리고 역학자는 누구보다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예방의학과 공중보건 활동은 그 자체로 이타적이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에요. 일 자체가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서지요. 그러나 역학적 연구나 조사 활동에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그 대상인 환자나 일반 국민들의 인권을 해치는 일이 의외로 많아요. 가령 사람을 대상으로 한 조사연구 활동에 있어서 연구 내용과 활용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동의’ (Informed consent)를 얻는 일이 그 좋은 예이지요. 제가 4년 간 관여했던 유엔 산하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의 <생명윤리 및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n Bioethics and Human Right> 에도 이점을 강력히 제안하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미국공중보건협회 (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 APHA) 안에 <윤리포럼, Forum on Ethics)를 설치하여 보건의료인들의 생명윤리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미국역학회 (American Epidemiology Association) 에서도 윤리지침을 만들었으며 미국보건대학원 협회에서는 윤리 강좌 개설을 결의하는 등 일찍부터 보건의료인, 특히 보건분야 윤리문제를 다루어 왔어요. 역학자를 포함한 보건학도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공공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 할 의무’ (Restoring and protecting the public's health while respecting individual Autonomy) 가 있다고 생각해요.






 - 마지막으로 한국역학회에 바라시는 점이나 앞으로 학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사실 메르스나 사스가 크게 유행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감염성 질환 유행 관리에 대해 잘 모르는 저로서는 이거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지요. 그런데 정말 우리 역학회와 전문가들이 적극 참여해서 큰 위기를 잘 벗어 났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우리 역학회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염성 질환 유행에 대한 대비를 잘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앞으로 또 이런 일들이 없으리라는 법이 없지요. 그래서 계속 전문가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아 보여서 걱정이에요. 의과대학 졸업자들 중에 예방의학을 전공하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공중보건 활동에 매진해야 할 보건소들도 오히려 진료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학회가 앞장 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할 거예요.

 10여년 전, 우리나라 <국민건강계획 2010>을 만들 때 관여를 해서 마지막 보고서 감수까지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보건소의 활성화 문제와 함께 소위 건강증진 공무원’ (Health Promotion Officer)팀 제도 도입을 주장한 일이 있어요. 1960년대 보건소 가족계획 사업을 연상하면서 금연, 절주, 영양지도, 및 운동 전문가 등을 한 팀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건강증진 활동을 하자는 제안이었어요. 나는 우리가 이런 일을 하기에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학회가 이를 위해 정부와 계속 대화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학회차원의 <역학연구 윤리강령> 같은 것을 만들어 보급하고 대학 교육에도 반영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역학회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무대에서도 한 역할을 했으면 해요. 일본역학회는 우리보다 늦게 만들어진 학회지만 세계역학회에서나 아시아역학회 (Asia Epidemiology Association) 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거든요. 일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만 하고도 학술교류를 따로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제는 우리도 아시아지역이나 국제무대에서도 충분히 지도적 역할을 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학회에서 영문 전자잡지를 발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우리 학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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